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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방전(孔方傳)

 

- 돈의 일생 -

    서하 조부님의 대표작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가전체소설

 

공방의 자는 관지(貫之:꿴다는 뜻)니, 그의 조상은 일찍이 수양산의 굴속에 살았었다. 그리하여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는데 황제(黃帝) 때에 최초로 초빙되어 채용되었으나 성질이 강경하여 세상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였다. 황제가 관상쟁이 신하로 하여금 그의 관상을 보게 하니, 그 신하가 한참 동안 그를 들여 다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산과 들에 아무렇게나 자란 바탕이라 아무리 씻고 닦고 하여도 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폐하께서 조정의 신하들로 하여금 그를 풀무 속에 넣고 녹여 서 변화시킨 뒤에 광채를 내게 한다면 본래의 자질이 드러날 것입니다.

 

임금은 신하를 임용하는 데 있어서 이와 같이 그 자질과 됨됨이를 따라 변화도 시키고 키우기도 하는 것이니, 바라건대 폐하는 그를 무딘 동(銅)이나 쇠붙이와 같이 취급하지 마십시오." 드디어 황제가 관상쟁이의 말에 따라 그를 풀무 속에 넣고 변화시킨 결과, 공 방은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뒷날 난리를 만나 다시 강물 가의 용광로로 옮겨 갔는데 이때부터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공방의 아버지 천(泉)은 주(周)나라의 대재(大宰)가 되어 나라의 세금을 맡아 다스렸었다. 공방은 그 됨됨이가 바깥쪽은 둥글고 안쪽은 모가 났는데, 시대에 따라 그의 직책이나 역할도 변화하였다.

 

저 한(漢)나라 때에는 홍로경이 되었는데, 당시에 오왕(吳王) 비가 교만하고 아첨을 잘하여 나라를 마음대로 쥐고 흔들 때라 공방 이 그를 많이 도와주었다. 호제(虎帝) 때에는 온 천하가 흉년이 들어 모든 창고가 비자, 임금이 걱정하여 공방을 부민후(富民侯)로 삼고, 염철승(鹽鐵丞) 근(僅)과 함께 조정에 머무르게 하였다. 근(僅)은 늘 공방에게 이름을 부르지 않고 '가형(家兄)'이라고 불렀다. 공방은 성품이 탐욕스럽고 염치가 없어서 나라의 재산을 총괄하게 되매 '(子母 輕重法)'이라는 저울에 다는 법을 만들어,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 신을 옛날과 같이 용광로에 넣어서 일정한 틀에 녹여 부을 필요가 없게 하였다.

 

이리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저울 눈금을 가지고 서로 다투게 하고 물건 값을 마음대로 좌우하게 하여 결국에는 곡식을 천히 여기고 자신을 중히 여기게 하였 다. 동시에 백성으로 하여금 근본을 버리고 말단의 이익을 추구하게 하여 농사 의 중요성을 방해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간관(諫官) 등이 그를 논박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임금은 그 논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방은 또 권세 있는 사람의 비위를 잘 맞추어 그들의 집을 마음대로 드나들며 권력을 빙자하여 벼슬을 사고 팔게 하니 모든 권력이 그의 손바닥에서 놀아났다.

 

마침내 공경대부 같은 높은 벼슬아치들도 모두 고개를 숙이고 그에게 아첨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에게 뇌물을 주겠다고 약속한 문권이 산처럼 쌓였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물건을 받았는데 상대방의 인간됨이 어떤가를 따지지 않았 음은 물론 시정(市井)의 잡배들이라도 재물만 많으면 다 사귀었다. 그리고 때로 는 시골의 건달패들을 따라다니면서 활 쏘고 장기 두고 바둑 두는 일도 협조하였는데 당시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공방의 말 한마디는 천금과 같이 중하다."고 하였다.

 

원제(元帝)가 즉위하자 공우(貢禹:간의대부)가 상소하였다. "공방이 그동안 오래도록 중요한 직책을 맡았으나 농사의 중요함을 알지 못하 고 오로지 물품을 교환하는 이익만을 추구하니, 나라와 백성에 해가 되어 공사 (公私)가 모두 위험한 지경에 빠졌습니다. 게다가 뇌물이 횡행하여 청탁이 공공연히 행해집니다. 곧 '천한 자가 짐을 진 채 수레에 오르니 도둑이 노릴 것은 뻔한 일이다.'라는 말은 『주역』에 분명히 씌어 있는 교훈입니다. 바라건대 그의 관직 을 빼앗아 그의 탐욕스러움을 징계하소서." 당시에 곡식을 중요시하는 정책으로 벼슬길에 나와서 국경의 군비를 충당하는 정책을 세우려던 자가 공방의 일을 질투하여 공우의 상소에 찬성하니 임금이 드디어 그 상소를 윤허하였다.

 

벼슬길에서 쫓겨나게 된 공방은 그의 문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 동안 우리 임금님을 만나 홀로 천하를 경영함에 있어서 국가의 경비를 충족하게 하고 백성의 재물을 풍부하게 하려던 것뿐이었는데, 지금 하찮은 죄로 축출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등용이 되든 축출을 당하든 간에 나에게는 하 등의 손익이 없다. 다행히도 나의 목숨은 실과 같이 끊어지지 않고 있으니 주머니의 아가리를 틀어막고 가만히 들어앉은 채 먼 강가의 조그마한 마을로 돌아가겠다. 그리하여 낚시나 놓고 개울가에서 놀다가 물고기가 잡히거든 술이나 사서 마시겠다. 그리고 육지와 바다의 상인들과 함께 배를 띄우고 놀면서 나의 평생 을 마치는 것으로 만족하련다.

 

비록 천종록(千種祿:많은 재물)과 오정식(五鼎食: 다섯 솥의 음식)을 준다고 한들 이 즐거움에 비하겠는가? 어떻든 내가 시행하던 정책은 오래지 않아 다시 계속될 것이다. 화교(和嶠)가 그의 기풍을 소문으로 듣고 많은 재물을 들여 그를 주머니 속에 간직하며 아꼈는데, 마침내 그를 사랑하는 벽(癖)을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노포 (魯褒)가 그를 논박하고 잘못된 풍속을 바로잡으려 하였다. 저 완선자[阮宣子:진 (晉)나라 원수(阮修)]는 성품이 호방하여 속물(俗物)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공방 의 무리와 지팡이를 끌며 같이 노닐다가 술독 근처에 가면 그만 술을 사서 마시 곤 하였다.

 

또한 왕이보[王夷甫:진(晉)나라 왕건(王愆)]는 공방을 상대하면 창피하다고 하여 공방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다만 "이놈의 물건(阿楮物)."하고 불렀으니 청담론자(淸談論者)들이 공방을 천하게 여김이 이와 같았다. 당(唐)나라가 일어나자 유연(劉宴)이 탁지판관(度支判官)이 되었는데 나라의 재물이 넉넉하지 못한 것을 염려하여, 왕에게 다시 공방의 정책을 실시하면 국 가 경제가 편리해질 것이라고 간청하였다. 이 말은 『식화지(食貨志)』에 실려 전한 다. 당시에 공방은 죽은 지가 이미 오래되었고 그의 문도(門徒)들이 사방으로 흩 어져서 살고 있었는데, 이들을 찾아내어 다시 등용하니 그 정책이 개원·천보(開 元·天寶:713--755년, 당 현종) 연간에 크게 성행하였다. 그리고 임금은 조서를 내려 공방의 벼슬을 조의대부 소부승으로 추증하였다.

 

남송(南宋) 신종(神宗:1068--1086) 때에 이르러 왕안석(王安石)이 국권을 잡 자 여혜경(呂惠卿)을 끌어들여 함께 정사를 다스려 나갈 때에 청묘법(靑苗法)을 만드니 세상이 매우 시끄럽고 나라 경제가 곤궁하여졌다. 소식(蘇軾:소동파)이 그 폐단을 엄하게 논박하여 모두 배척하려 하였으나 도리어 모함을 당하여 벼슬 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 뒤로 조정의 선비들이 감히 함부로 말하지 못하다가 사마광(司馬光)이 정승으로 들어오자 청묘법을 폐하고 소식을 등용하기를 청하였다. 공방 무리의 세력이 차츰 쇠퇴해지고 더 이상 번창하지 못한 것은 이때 부터였다. 공방의 아들 윤(輪)은 성품이 경박하여 세상 사람들로부터 질책을 받았는데 후 수형령(水衡令)이 되었다가 장물(臟物)이 발각되어 처형당하였다.

 

역사가는 이렇게 적고 있다. "남의 신하가 되어 딴마음을 먹고 이익을 추구한다면 어찌 충신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공방은 때를 만나 등용되고 임금은 그를 사랑하여 손을 잡고 나라의 장래를 간곡히 부탁하였으니, 그는 더할 수 없이 큰 은총을 받은 것이다. 마땅 히 국가에 이익을 주고 피해를 없애서 그 은혜에 보답했어야 하거늘 오왕 비를 도와 권력을 휘두르고 또 사당(私黨)을 세웠으니, 충신도 못 되었고 분수도 없이 교제한 자이다.

 

공방이 죽자 그 문도들이 다시 남송에 등용되었는데 그들은 위 정자에게 아부하여 도리어 정당한 사람을 모함하였다. 비록 잘 잘못에 대한 이치 야 할 수 없다지만 만일 원제가 공우의 말을 듣고 한번에 모두 쓸어 없애 버렸다 면 가히 후환이 없었을 터인데 겨우 세력을 억누르는데 그쳐 그로 말미암아 후 세에 폐단을 끼치게 되었다. 이렇게 앞일을 내다보지 못한 우(愚)를 범했으니 이 어찌 한탄스럽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