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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성 23세 임방공

 

방공은 주 경왕시대에 대부가 되시었다. 공자님의 제자로 72현 가운데 한분으로 들어 계시다.

 

예의 근본에 대해 묻다.

자는 자구(子丘)이고 춘추시대 노나라의 청하 출신이다.  은나라 충신 비간의 23세손이다.

주(周)나라 경왕 때 노나라의 대부를 역임했고, 태부(太傅)로 섬겨졌다. 공자의 수제자 72명을 가리키는 공문칠십이현(孔門七十二賢) 가운데 한 사람이다.

『논어』 「팔일(八佾)」 편에 “임방이 예(禮)의 근본에 대해 물으니 공자가 말하기를 ‘크구나, 물음이! 예는 사치하기보다는 검소할 것이고, 상례(喪禮)에서는 절차만 번지르르하기 보다는 슬퍼해야 한다’”라고 하며 공자가 그를 칭찬하는 대목이 나온다.

공자 사당에 위패가 세워지다.

사후에 산동성 공자묘에 종사되시었다. 당 현종 개원(開元) 27년인 739년에 서하백이라는 호를 내리고 송 고종이 장산후로 가봉하였다. 서하는 박릉에 있고 세계임씨 시조 견공이 사시던 땅이다. 장산은 목야 장림산에 이어진 세계임씨 시조 견공이 탄생하신 땅이다.

각 지방의 모든 공자 사당에 임방의 위패가 세워져 있으며, 우리나라의 문묘에도 종향 되었다.

 

참고문헌

• 『예전도(』禮殿圖)』

• 『논어(論語)

 

득성 64세 임록공 

복건성 진안당(福建省 晉安當)시조

 

득성 임씨 60대 임록(林䘵)공은 서진(西晉) 무제태강(武帝太康) 10년에 탄생하시어 영가지화(永嘉之禍) 뒤에 그 부친 영공(영공)과 낭야왕 사마예(司馬睿)를 따라 남도 하셨다.

안동 낭야왕부의 참군으로 임명 되었다가 낭야왕 사마예가 칭제한뒤에 곧 황문시랑 초원장군 산기상시 합포태수를 역임하고 동진(東晉) 명제(明帝) 태녕 3년에 이르러 칙명으로 진안군 태수에 임명되고 진안에 살면서 드디어 가문을 이루었다.

이 분이 진안당의 시조이시다.

녹공은 민림의 시조가 되시니 세계 임씨의 시조 견공의 직계 64세이시다.

진안당 녹공의 후예는 복건, 광동, 강서, 절강, 대만및 강남, 기타 각성에 번성하여 널리 퍼졌는데 해외 각지에 대단히 많이 나아가 살고 있다. 대만 임씨도 민남(閩南) 이거나 혹은 객가(客家) 이거나를 막론하고 거의 모두 녹공의 후예로 이어지니 그 조상은 한 분 이시다.  친족 간에 돈목할 것은 당연하며 이것이 지극히 소망되는 것이다. 녹공(䘵公)은 경(景)과 나(邏)를 낳으셨다.

 

득성 78세 임 만총공

 

만총공의 자는 성인 또는 성공이라고 하셨는데 현태공의 장자이시다.  

당 현종 개원 8년 경신(720년)에 명경과에 뽑히시어 신안군 문학에 제수되시고 여러번 옮겨 장사 요주태수가 되시고 고평군 제군사 행고평태수로 고쳤다.  배부인 황씨는 아버님 곁에 장사 지냈는데 보전현의 서북 존형리 자운암 오른쪽 계제평 경신향에 있다. 세 아들 도, 피, 창을 낳으셨는데 우리 한국임씨는 둘째아들인 임피공의 후손이다.

 

복건성 팽성촌 팔학사 동도기념비 와 평택시 팽성읍 세거지

 

 

 

( 복건성 팽성촌 팔학사 동도 기념비 )

 

 

 

 

 

 

( 평택시 팽성읍 세거지)

 

득성 79세 임 피(披)공

 

피(披)공의 자는 무언 또는 무칙이라 하였으니 만총공의 둘째 아드님이시다.

나이 15세에 손수 육경과 자사 천여 권을 베껴 쓰고 당나라 천보 1년 입진 시기 752년에 나이 20세에 명경과에 급제하여 장악령이 되시고 장주자사 예주삼하 강주자사로 옮기시고 임정군조연으로 좌천되셨다가 임강령으로 다시 임명 되셨다.

그 지방에는 산귀가 많았는데 무귀론을 지어 결국은 요사스러운 일이 없어졌다. 이것이 상주되어 임정별가 지주사에 제수되셨다.

풍류로 백성을 교화하여 치적이 있다는 것이 궐하에 보고되었다. 어사 이서군이 상주하여 태지침사 겸 소주별가로 제수하였고 자급이 대를 하사하고 상주국에 봉하였다. 인수를 풀고 40년동안 뜻을 고상하게 갖고 청렴결백 하였다. 은총을 받거나 곤욕을 당하거나 놀라지 않았다. 광수설경이 상주하여 경주도독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고상국 상년이 말하기를 임군은 충치유룡이다라고 하였고, 거처하 는 곳에 청룡과 백작에 이적이 있있다. 아들 9사람이 모두 숭진하여 자사가 되었으나 이것을 보전구목이라고 부르며 이분들이 구목연파의 시조가 되신다.

보경 원년에 온이 귀하게 된 때문에 목주자사로 온중이 내렸다. 일동지 군지에 모두 전기가 있다.

 

배부인 정씨는 증남안현 태군이신데 아들 위,조, 저, 천, 엽을 낳고 계취 진씨도 또한 증남안현 태군이신데 아들 온, 몽, 매를 낳으셨다. 부실 주씨가 아들 기를 낳았다.

정씨. 진씨. 주씨를 모두 상구산에 장사지냈는데 공 홍화부 성북의 인덕리 진저 뒷쪽 농산계정향이다.

혈의 이름은 삼태공요 혈이다.

옛날에는 묘 서쪽에 사당이 있었고 신도비는 묘의 남쪽에 있었는데 황소의 난리 때 부서졌다.

명나라 홍치 18년 을축년 서기 1505년 소주의 후손형부상서 준공이 우리 대종과 함께 묘역을 수리하고 봉분을 높혔다.

명나라 가정 임술에 또 왜놈들이 파괴하였는데 대종이 다시 중수하였다.

말력 38년 경술년에 묘사 한좌를 중건하였다.

 

첫째 아들 위(葦)공은 당 덕종 건중(唐德宗建中) 원년에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여 단주자사(端州刺史)로 마치셨다.

둘째 아들 조(藻)공은 당 덕종 정원(唐徳宗貞元) 7년에 윤추방(尹樞榜) 의 진사(進士)에 올라 영남부사(嶺南副使)에 임명되었다가 강릉부사(江陵府使)로 마쳤다.

셋째 아들 저(著)공은 당 덕종 정원(唐德宗貞元) 6년 명경과에 급제 하여 횡주자사(横州刺史)로 마쳤다.

넷째 아들 천(薦)공은 당 덕종정원(唐德宗貞元) 12년에 명경과에 급제하여 진사(進士〉에 오르고 소주자사(韶州刺史)로 마쳤다.

다섯째 아들 엽(曄)공은 당 덕종 정원(唐德宗貞元) 9년에 명경과에 급제하여 통주자사(通州剌史)로 마쳤다.

여섯째 아들 온공은 당 덕종 정원 4년 무진년인 788년 명경과에 급제하여 예부원 외랑에 제수되고 소주지사에 임명되었습니다.

일곱째 아들 몽공은 당 덕종 정원 연간에 맹릉주부로 제수 되었다가 순주지사로 마쳤다.

여덟째 아들 매공은 당 덕종 정원 연간에 명경과에 급제하여 뇌주지사로 마쳤다.

아홉째 아들 기공은 당 덕종 정원 연간에 명경과에 급제하여 복당지사로 마쳤다.

 

득성 80세 임온林蘊공

 

득성조 80세인 임온林蘊공(서기 788년)은 구목연파 第六房의 시조이고 81世 원공愿公 - 82世 옹공邕公 - 83世문범文範공으로 계대되어 있으나 문범공文範公 장자 자리가 비어 있고 차자는  文回公으로 계대 되어 있다.

구목연파 제육방 보첩에 󰡒閩林二十世 文範公 生一者 八及海東林氏 始祖 移居 신라국󰡓으로 기록된 점 (자료: 韓國林氏源流族譜) 팽성 부근 복건성 보전甫田에 구목사九牧祠가 있는 점, 목사는 온공의 할아버지 아버지와 구형제九兄弟의 묘와 영정影幀을 모신 곳이다.

삼대공요의 만총의 손자이고 피의 9형제중 6번째 아들로 이분의 9형제가 모두 자사刺史를 지내어 9목사九牧詞라 칭하고 있다.    이상의 자료에 의거하여 볼 때 팔급공이 당나라에서 동도 했다는 것이 확실하며 우리 나라 林氏는 구목연파(九牧衍派) 제육방(第六房)의 계보 손이다.

서하임춘西河林椿조부님의 서하문집 가운데 수록되어 있는 중추회음서中秋會飮序 중에 “금년중추 하루 전날 이담지가 나에게 글을 보내와 하는 말이, 오늘 저녘에 술을 갖추어 명월아래 잔을 주고 받으며 우리집 고사를 다시 닦아볼까 하는데 자네도 제남濟南(임온의호)의 후손이 아니던가 어찌 옛정을 잊을수 있겠나” 한 것으로 미루어 임온의 현손인 임팔급께서 당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동도 하셨다는 단서가 되었다.  

또한 서예 과정에서 올바른 서법 익히기에 나오는 영자팔법永字八法이 있다.  영자팔법은 당시의 서법을 ‘永’자의 여덟 점획에서 찾아 표시한 기법이다.  

각각의 획을 따로 떼어 측(側), 륵(勒), 노(努), 적(趯), 책(策), 략(掠), 탁(啄), 책(礫)으로 분류하여 말한 것이다.

당나라 임온(林蘊)이 쓴 ‘발등서(墢鐙序)’에 나오는 글로 많은 서법가들이 이를 서법의 길잡이인 것처럼 추앙하여 잘 알려진 인물이다.

현손 중에는 강과 바다를 지키는 신선 마조 임묵랑이 있으며, 고손高孫 임팔급 八及공께서 당나라 말 한림학사병부시랑翰林學士兵部侍郞의 벼슬을 하던 중 조정이 극심한 혼란기를 맞아 동료 7학사學士와 함께 고향 당나라의 팽성에서 배를 타고 당시 통일신라의 아산만 상류로 동도東渡하여 현재의 평택시 팽성읍에 정착하시니 이분이 우리나라 林氏의 시조가 되었다.

 

참고문헌 :

구목연파 제육방보첩. 韓國林氏源流族譜.

발등서(墢鐙序)

 

(삼대공요 초상화)

 

(임온 초상화)

 

(구목묘역 페루)

 

(구목묘역)

 

(제6방 임온묘)

 

신선神仙 이 되신 우리 조상 임묵林黙 마조媽祖

임 종 상

 

비간공 탄신일 기념 시향을 마치고 중국의 조상 유적지를 탐방하는 마지막 날 마조 사당과 미주도를 탐방하였다. 마조의 동상과 사당은 중국 해안선을 따라 수 없이 많이 세워져 있고 대만에서도 많은 사당과 동상을 세워 제사를 지내고 바다로 나가는 사람들의 수호신으로 숭배되고 있는 분이다.

 

임묵(林黙)은 우리의 직계조상인 임온(林蘊) 7세손이시다.  당나라 헌종(憲宗)때 동남쪽 연해안 일대 미주도(湄州島)섬에 이미 연년생으로 네 명의 아들을 둔 임씨 부인은 관세음보살이 그녀에게 무화가 한 알을 주는 꿈을 꾸고 임신을 했다. 14개월이란 오랜 임신 기간이 지난 후에 드디어 여자아이를 낳았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 방안에는 아름다운 향이 가득한 채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보통 아이가 태어나면 시끄럽게 울기 마련인데, 어찌된 일인지 이 아이는 몹시 조용했다. 그래서 이름을 ‘고요하다’는 뜻의 ‘묵(黙’자로 지었고, 평상시에는 임묵랑(林黙娘)이라 불렀다.

 

임묵낭은 일찍부터 철이 들고 머리도 총명했다. 하루는 부모가 절에 가서 제사를 지낼 때였다. 어린 묵낭이 뜻밖에도 양손으로 합장하며 정성을 다해 예불을 드리는 것이 아닌가. 부모의 놀라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다섯 살 때 벌써 관음경(觀音經)을 줄줄 외우고, 날마다 절에서 퍼져 나오는 음악소리에도 심취했다.

 

묵낭의 아버지는 자식들을 데리고 주변 작은 섬을 찾아다니며 물고기를 잡았다. 이날도 형제들이 아버지를 따라 바다로 나가고, 오직 묵낭과 그녀의 어머니만이 덩그러니 남아 집을 지켰다. 그날 밤 어머니가 묵낭의 방안을 살피다가 그녀의 안색이 심상치 않음을 보고 흔들어 깨웠다. 하지만 아무리 흔들어도 그녀는 일어나지 않았다. 놀란 어머니가 딸의 어깨를 힘껏 흔드니 묵낭이 큰소리로 우는 것이 아닌가. 그제야 묵낭이 깨어났다. 그러나 그녀의 안색이 몹시 초췌해 보였다.

"왜 저를 불러들였어요. 그 때문에 제가 큰오빠를 사경에서 구해내지 못했잖아요."

그녀의 어머니는 묵낭이 무언가에 놀라 정신이 잠시 나갔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 바다에 나갔던 아버지와 형제들이 돌아왔다. 하지만 묵낭의 큰오빠가 보이질 않았다. 알고 봤더니, 어젯밤에 한바탕 폭풍이 세차게 불어 많은 사람들이 바다에 빠졌는데, 한 여신의 인고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그녀의 큰오빠만 죽게 되었다는 것이다. 임씨 부인은 어젯밤 묵낭의 말투가 몹시 비장했던 사실을 떠올리고는 그녀가 말한 것이 모두 사실임을 깨달았다.

 

묵낭은 하루 하루 자라서 어느새 혼인할 나이가 되었다. 부모 입장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딸에게 맞는 배필을 찾아주고자 했지만, 정작 본인은 혼인할 마음이 전혀 없는 듯 했다. 사실 그녀는 혼인보다도 더 중요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곳곳에서 사람들을 구제하고 선을 베풀면서 그녀의 명성은 점점 쌓여갔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에게서 신선술을 전해 받더니 그녀도 신선이 되었다.

그 후 어떤 사람이 바닷가에서 등잔불을 들고 있는 여신을 보았는데, 그녀가 바로 마조(媽祖 임묵낭 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그녀가 마을 사람들을 위해 베푼 수많은 일들을 기념하고, 또 그녀가 이곳에서 마을을 지켜주기를 희망하여 서로가 힘을 합쳐 마조 사당을 세웠다. 이후로 마조 사당의 향불은 끊어지지 않았고, 기도 또한 매우 영험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아이를 갖지 못하는 여자가 여기에 와서 빌면, 곧 바로 자식을 점지 받을 수 있었다.

 

송나라 때 전염병이 온 마을을 휩쓴 적이 있었다. 그때 마조가 나타나 사람들에게 맑은 샘물을 길러와 마시면, 약을 먹지 않고도 병이 나을 것 이라고 일러 주었다고 한다. 마조가 행한 기이한 일들로 인해 역대의 황제들은 앞 다투어 그녀에게 봉호를 하사했다. 부인과 천비, 천후에 이르기까지 그녀에게 부여된 봉호는 그녀의 지위와 명성을 더더욱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청나라 건융황제로 부터 천상성녀 마조라는 칙봉과 칙명을 받으셨다.

 

마조 곁에는 두 명의 수호신이 있었다. 천리안(千里眼)과 순풍이(順風耳)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원래 은(殷)나라 주왕(紂王)의 신하였는데, 주(周)나라 무왕(武王)과의 전쟁에서 죽었다. 둘은 죽어서도 이승을 떠나기 아쉬워하며, 도화산(桃花山)을 차마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조가 그곳을 지나가는데 그들이 길을 가로막고 못 가게 했다. 한바탕 싸움이 벌어졌고, 결국 마조가 둘을 제압했다. 그런데 그들에게 도(道)를 구하려는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안 마조가 그들을 거두어 자신을 호위하도록 했다고 한다.

현재 미주도 마조사당 및 기념관은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관리 보존되고 있다.

 참고문헌 : 천추성., 중국의 신화. 비간문 연구. 현지답사

 

(신선 마조 임묵 동상과 사당, 탄신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