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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父親) 휘(諱)는 광비(光庇)니 좌의정(左議政)에 시호는 문정(文貞)이요

모친은 나주오씨(羅州吳氏) 순군(循軍) 부령(部令) 효석(孝碩)의 따님이다.

공(公)은 나면서부터 영특해서 육(六) 칠(七)세에 많은 글을 깨우쳤으니 타고난 문장(文章)이 오묘한 지경에 이르렀고 성리종회(性理宗會) 삼재상수(三才象數) 등(等) 서수십편(書數十編)을 지었다.

의종조(毅宗朝)때 진사(進士)에 오르더니 정중부(鄭仲夫)의 난(亂)을 피(避)하여 예천(醴泉) 지과리(知過里)로 옮겼고 그 당(堂)의 이름을 희문「喜聞」이라 하고 한가히 임천(林泉)에 조섭하며 도학(道學)을 강론(講論)해 후학을 일깨우므로서 혼신(渾身)의 노력을 다했다.

제방(堤防)을 쌓아 서정(西亭)을 짓고 임천(林泉)을 터 놓아 물길을 열어 수 천여석(數千餘石)몽리의 땅을 만들어 거민(居民)을 넉넉히 살도록 했다.

 

당시의 현사(賢士) 이인노(李仁老) 오세재(吳世材) 조통(趙通) 함순(咸淳) 황보항(皇甫沆) 이담지(李湛之)로 사귀어 함께 강좌칠현(江左七賢)이 되었고 향년(享年) 삼십삼(三十三)세에 졸(卒)하니 묘(墓)는 경기도(京畿道) 김포군(金浦郡) 검단면(黔丹面) 마전리(麻田里) 가련산하(佳連山下) 사자봉(獅子峰) 남록(南麓) 임좌(壬坐)의 언덕에 있다. 이규보(李奎報)가 지은 묘지서(墓誌序)에는「성품이 고초하고 재행(才行)을 자부(自負)한 분이다.」명(銘)에는 「재조를 펴지 못한 것은 운명이다.」 이인로(李仁老)의 뢰문(誄文)에는「상서로운 기린 봉황에 비하고 태산(泰山) 화악(華岳)같이 드높은 분」이라했다. 뒤에 도학으로써 봉익대부삼사사(奉翊大夫三司使) 상장군(上將軍)에 추증(追贈)되었고 시호는 절의(節義)이다.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하음전씨(河陰田氏) 병부령(兵部令) 혁(奕)의 따님이고 공(公)의 묘(墓)에 합장(合葬)하였다.

 

삼자(三子)를 두었으니 맏이 충세(忠世)는 이부상서(吏部尙書)니 예천(醴泉)으로 관향(貫鄕)을 삼았고 다음 경세(敬世)는 문과(文科) 찬성(贊成)이니 부안(扶安)으로 관향(貫鄕)을 삼았고 셋째 정세(整世)는 예의판서(禮議判書)요 시호는 공혜(恭惠)이다.

공(公)의 자손(子孫)이 번성해서 김포(金浦) 순창(淳昌) 경주(慶州) 금성(錦城) 진주(晋州) 울진(蔚珍) 옥야(沃野)의 각관(各貫)으로 갈라졌다.

아! 공(公)의 아름다운 덕행(德行)이 백세(百世)의 사표가 될만하거늘 년대(年代)가 너무 멀어 가승(家乘)에도 상고할 수가 없다.

 

다만 문집(文集) 육권(六卷)이 있는데 고려 중 담인(淡印)이 병화(兵火)에 유실될까 두려워해서 구리 동이에 넣어 청도(淸道) 운문사(雲門寺) 약야계(若耶溪) 암석간(岩石間) 동탑(銅塔)속에 감춰 놓은지 오백년(五百年)뒤에 중 인담(印淡)이 꿈을 꾸고 담인(淡印)이 감춰 놓은 원본(原本)을 찾아내어 세상(世上)에 내놓게 되었으니 이 어찌 황천(皇天)이 끝내 도학(道學)을 숨기지 아니하고 세상(世上)에 크게 발천(發闡)한 것이 아닌가?

숙묘(肅廟) 경인년(庚寅年)에 공주기호사(公州岐湖祠)에 향사(享祀)를 올렸고 경종(景宗) 정미년(丁未年)에 또 예천(醴泉) 옥천사(玉泉祠) 안동원(安東院) 및 흥양(興陽) 낙안(樂安) 여러 사당에 제향(祭享)하되 송문정공휘시열(宋文正公諱時烈)이 제문(祭文)지어 치제하고 송찬성(宋贊成) 환기(煥箕)도 또한 제문(祭文)을 지어 치제를 하였으니 과연 후학(後學)의 종사(宗師)임을 넉넉히 알수가 있다.

 

그러나 산소(山所)를 여러번 병화(兵火)끝에 실전하였다. 다행히 후손(後孫) 상호(相皥)가 신몽(神夢)을 얻어 지성(至誠)을 다해 살펴 보던중 도적이 파묻은 비명(碑銘)을 찾아 내었다.

이에 불초(不肖)와 재봉(在鳳) 흥모(興模) 몇몇 분들이 종의(宗議)를 수렴해서 삼가 묘도(墓道)를 수축해 추모(追慕)할 장소를 완봉(完封)했으니 부디 후예(後裔)들은 길이 수호(守護)하기를 바란다.

 

 

하운공 재호와 해사공 승익께서 찾아오신 서하공 유택

 

서하공의 십팔대 손인 개곡리 종인으로서 휘는 재호요 일생포한이던 실전한 선영재심을 실현코저 불철주야 일심 정려하여 공의 문집에 기재된 묘는 김포군 가연산 남압사 동구혈유지원이라 명확히 기재 되였음을 가슴에 품고 십여 차 당지를 동찰 하였지만 석물이 사방에 쓰러져 있음을 보아 분명히 실전 선영임이 틀림없음을 짐작하였으나 그 당시 산판은 신, 안 양성의 소유로 되어 있으며 신, 안 양성의 세력이 당당하여 안 될 처지에 놓여 있어서 변성하여 양가의 고용살이 사년간을 하면서 양가의 태도와 동정을 살피면서 그 사이에 이간을 붙여 양성이 현 서하공 묘소에서 다투며 말하기를 이 산소가 임서하의 묘인지라 이 묘를 경계로 이 북은 신씨 소유로 하고 이남은 안씨 소유로 하자는 말을 들었으며 이 내용을 양가에서 알게 되자 하은공은 죽도록 매를 맞았으며 그 당시에 하던 말을 자세히 듣고 즉시 개곡리에 가서 종인들에게 그 사실을 편론하고 종인 수백 인을 데리고 신, 안양인 입회하에서 서하공 묘소 주위를 파보니 과연 지석에 임춘의 배하전의 칠괴를 획득 하였으나 형적을 없애기 위하여 파쇄하여 다시 묻은 것이다 이로서 서하공 묘소를 찾게 된 것이다

서하공(西河公)의 18대손인 하운공 임재호(林在皞)께서 실존된 서하공의 묘소를 찾아 오려고 모진 고생과 7년간 송사를 진행하다가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병으로 타계하셨다.  

 

임 휘승익(林承翼) 조부님의 자는 경하(景河) 이고 호는 해사(海史) 이시다. 서하공(西河公)의 20대 손이시고, 부친 형석의 둘째 아들로 월곶면 개곡리에서 태어나셨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선생 문하에서 사사 받으셨고 갑오경장과 동학 농민 봉기등으로 혼란한 시절인 갑오(甲午)1894년 사마시(司馬試)에 등과(登科) 장원급제하여 정3품 통정대부 돈녕부 도정(通政大夫 敦寧府 都正)에 제수(조 왕조실록)되셨다.

 

하운공 재호께서 끝내 서하공 묘소를 찾아오지 못하고 타계하셨다는 소식을 접한 해사공 승익께서 이를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셨다. 선조의 가승문집 세보 지석등을 가지고, 공의 특출한 문장로 고종황제에게 직접 상주하셨다.  

 

드디어 고종25년 2월 어명판결(御命判決)을 받으셨다.  서하공의 600여년 동안 실전된 묘소를 찾아 현재에 이르게 된 것으로, 하운공 재호와 해사공 승익께서는 우리 가문(家門)에 큰 공과 업적을 남기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