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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운공 휘재호 공덕비

 

서하공의 휘는 춘이요 시는 절의니 유림설조형사지 처가 오개소나 있느니라  공의 묘소를 년대조차 요요 불문인데 수 백년간을 실전하여 궐사 폐향을 하였다 함은 공의 후예된 본의로서 어찌 부끄럽지 안으리오  서하공의 십팔대 손인 개곡리 종인으로서 휘는 재호요 일생포한이던 실전한 선영재심을 실현코저 불철주야 일심 정려하여 공의 문집에 기재된 묘는 김포군 가연산 남압사 동구혈유지원이라 명확히 기재 되였음을 가슴에 품고 십여 차 당지를 동찰 하였지만 석물이 사방에 쓰러져 있음을 보아 분명히 실전 선영임이 틀림없음을 짐작하였으나 그 당시 산판은 신, 안 양성의 소유로 되어 있으며 신, 안 양성의 세력이 당당하여 안 될 처지에 놓여 있어서 변성하여 양가의 고용살이 사년간을 하면서 양가의 태도와 동정을 살피면서 그 사이에 이간을 붙여 양성이 현 서하공 묘소에서 다투며 말하기를 이 산소가 임서하의 묘인지라 이 묘를 경계로 이 북은 신씨 소유로 하고 이남은 안씨 소유로 하자는 말을 들었으며 이 내용을 양가에서 알게 되자 하은공은 죽도록 매를 맞았으며 그 당시에 하던 말을 자세히 듣고 즉시 개곡리에 가서 종인들에게 그 사실을 편론하고 종인 수백 인을 데리고 신, 안양인 입회하에서 서하공 묘소 주위를 파보니 과연 지석에 임춘의 배하전의 칠괴를 획득 하였으나 형적을 없애기 위하여 파쇄하여 다시 묻은 것이다 이로서 서하공 묘소를 찾게 된 것이다 고로 우리 후손은 그 분의 공로에 보답하는 뜻에서 늦게 나마 공로비를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