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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들이 말하는 귀하게 되고 장수 한다는 것

 

23세손 임 종 상

 

서하 휘諱 춘 조부님이 돌아가셨을 때 공의 친 구이자 당대의 문인 미수 이인로는 “배우는 사람 들 중에서 그의 문장을 외우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동양 최고의 시인으로 꼽히는 굴원과 송옥 의 반열에 세우려한다. 또한 군자들이 말하는 귀하게 되고 장수한다는 것은 바로 이를 말함 이리 라!” 라고 말하고 있다.

 

서하공께서는 신라 충절공 휘 팔급(당나라 한림학사로 신라 팽성에 동도하신 우리나라 임씨의 시조) 14세손이시고 고려 건국공신 벽상삼한태사 문헌공 휘 계미(부안임씨 의 시조)의 7세손이시다. 대대로 고관 벼슬을 하던 집안으로 백부 휘 종비께서 는 한림학사, 백부 휘 민비께서는 한림동 평장사, 부친 휘 광비께서는 문하시랑 평장사로 3형제가 모두 옥당에 오르셨다. 고려 의종 때 이러한 정치적. 경제적 기반을 지니고 있는 명문 가문의 후손으로 태어 나셨다.

 

학문적 스승이신 백부 휘 종비께 학문을 배우셨고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 나 육. 칠세 때 백가어(百家語)를 편독(遍讀)해서 정밀한 이치를 깨달으셨다. 청년기부터 문명을 날리며 문학적 명성으로 기반이 닦여 있었다. 가문의 힘 을 빌려 벼슬길에 오를 수 있는 신분이었지만, 학문을 떨쳐 입신하겠다는 기개 가 높아 당당한 등용을 준비해 오셨다. 항우를 사로잡은 장량처럼 제왕의 스승이 되는 것을 대장부의 참다운 사업 (장검행 중에서)이라 꿈꿔오며 진사과에 합격하여 과거 준비를 하고 계셨다.

 

그 무렵 고려 의종 때인 1170년 보현원에서는 왕이 신하들과 놀이를 즐기던 도중 한 젊은 문신이 무술 대련을 기권한 나이든 무신의 뺨을 때려 모욕을 준 사건이 벌어졌다. 얼마 전 문벌 귀족인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 자신의 수염을 촛불로 태우며 조롱한 것에 앙심을 품고 있던 정중부는 보현원 사건을 기회로 정변을 일으켜 그 자리에서 문신 귀족들을 모두 죽이고 의종을 폐위하고 명종을 세웠으며 모든 권력을 차지했다. 정중부 ,이의민,  최충헌등 무신정권이 계속 이어졌다.

무신정변으로 인해 문신 대숙청이란 무신정권의 폭정에 온 집안이 화를 당 하고 조상대대의 공음전과 살던 집조차 탈취 당한 채 홀로 몸만 겨우 탈출하 여 강남땅으로 피신 하셨다.

 

현재 남아 있는 글 중 대부분이 이 당시에 쓰여진 것인데, 당대의 명 문장가 이인로, 오세재, 조통, 황보항, 함순, 이담지등과 더불어 죽림고회竹林高會 강좌칠현를 이루시어 술을 벗하고 문학을 논하며 새로운 문풍을 일으키셨다. 주기사상主氣思想을 바탕으로 한 기질이나 개성을 중시하는 문장론을 주장 하셨고, 서書·계啓·서序·기記등 안분지기安分知機·가일可逸의 경지를 그려 내고 있다. 가전체 소설 국순전麴醇傳과 공방전孔方傳을 저술하시어 우리나라 고전문학사에 새로운 지표를 세우셨다.

 

그러나 입신으로 옥당에 올라 가문을 다시 세우겠다고 몇 차례 과거에 응시 하였으나 무신들이 정치를 마음대로 하는 무신정권에 경원 당하여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얼마 뒤 경기도 장단長湍으로 내려가 고뇌와 곤궁 속에서 향년 32세에 돌아가셨다.

 

西河公께서 돌아가신 20여년 뒤에 이인로李仁老(파한집. 쌍명재집의 저자)가 公의 원고 유편 약간을 수습하여 6권으로 편집하고, 서문에 "애석하게도 하늘 이 많은 날들을 허락하지 않아 저술한 것은 많지만 봉황의 터럭 하나를 보고 도 족히 아홉 종류의 날개 빛깔을 알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서하집이 처음으로 간행된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완질로 전하는 것은 없다. 서하집 이 중간 수 있었던 것은, 고려말 담인淡印스님이 혼란한 정세와 전란 속에 서 서하집을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하여 청도 운문사 청동항아리(보물제208호)에 복장품처럼 보관한 것을, 500여년이 지나 운문사 스님인 인담印淡이 꿈에 한 도사를 만나 그의 도움으로 다시 찾아 냈는데, 발견한 사람이 인담 이었다 는 점이 기이하다 해서 후대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시화집詩話集에서 도 자주 언급되고 있다.

이렇게 다시 찾은 서하집은 조선 숙종 39년(1714)에 14대손인 임재무에 의해 중간되었다.

서하공의 묘소 또한 실전되어 수백년간 찾을 수 없었다.

 

18대손인 김포 월곶의 후손 하운공 임재호는 서하공의 묘소가 실전되어 옴 을 안타깝게 여기며 묘소를 꼭 찾겠다는 결심으로, 당시 검단에 신씨와 안씨 의 집에 성씨를 바꾸어 들어가 4년 동안 벙어리행세하며 머슴살이를 하였다. 두 집안이 서하공 묘소를 경계로 소유에 대한 다툼을 목격하고 김포종인들과 함께 소유를 주장하고 7년의 송사를 진행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끝내 홧병으로 돌아 가셨다.

 

이후 19대손인 김포 월곶의 후손 해사 승익은 추사 김정희선생 문하에서 사사 받으셨고 갑오경쟁과 농민 봉기등으로 혼란한 시절인 갑오년 사마시에 등과 장원 급제하여 정3품 통정대부 돈녕부 도정에 제수되어 궁궐 내직에 근무 하셨다.

하운공 임재호의 노력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신 해사공께서 서하공의 가 승문집, 세보, 지석등과 공의 특출한 문장으로 고종황제에게 직접 상주하셨 고 고종25년 2월 어명판결을 받으셨다.

그리고 무자년 9월 검단 가련산 서하공의 잃어버렸던 묘택 과 지석을 찾고 난 뒤 10월 상달 15일에 산신제문과 서하공 제문을 지어 분향 총 하시고 제를 올리셨으니 현재 우리가 떳떳하게 시향을 올릴 수 있게 된 것으로 우리 가문에 큰 공과 업적을 남기신 것이다.

 

서하공의 국순전 과 공방전은 문교부 검정를 거쳐서 우리나라 최초의 가전체 소설로 밝혀졌고 현재 영인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과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에 나누어 보관 하고 있으며 중.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학생들이 배우고 있다.

서하문학의 일부는 동문선 東文選. 삼한시귀감 三韓詩龜鑑 등의 문헌에 편편이 전해지고 있다. 근래에는 많은 번역가들이 서하집을 출간하여 일반인 들의 교양서적으로, 학생들의 참고서로 읽히고 배우고 있으며, 수많은 석학들 이 서하문학과 철학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20여년간 서하공의 유필을 모아 6권의 책으로 만드신 미수 이인로님!

 

혼란한 정세와 전란 속에서 서하집을 안전하게 보존한 고려말 담인

淡印스님!

 

500여년이 지나 서하집을 다시 찾아낸 운문사 인담印淡스님!

 

서하집을 중간한 14대손인 임재무님!

 

머슴살이까지 하며 서하공 묘소를 찾던 18대손 하운공 임재호님!

 

고종의 어명판결을 받아 서하공 유택을 다시 찾아온 해사 임승익님!

 

서하공은 유복한 가정에서 탁월한 문학적 재능과 포부를 가지고 청소년기를 보내시다 무신정변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고 전락顚落되어 꿈이 좌절되고 가문이 몰락하였다.

그러나 의연하게 그의 이상을 문학으로 승화시켜 우리나라 고전문학에 커다란 업적을 남기셨다. 850여년 동안 전설과 같은 반전을 반복하며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나셨다.

우리는 그동안 서하공 찾기에 큰 공을 세우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려야 하며, 서하공의 선비정신과 문학적 공적을 높이 기리고 후세에 선양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이인로가 전한 “군자들이 말하는 귀하게 되고 장수한다!” 라고 생각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