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 내 전체검색

 

 

 

 

 

 

서하 임춘 문학비 를 제막하면서

 

23세손 임 종 상

 

지난해(2016년) 음력10월 15일 인천 검단 가현산에 위치한 서하공 묘소 시제 및 서하 임춘 문학비 제막식에는 전국 각지에서 150여명의 부안임씨 후손들이 경건한 마음으로 참석하였다.

 

약 18개월간의 기간 동안 묘역 정비공사와 묘소 앞에 가로1800X 세로1200X 폭300의 3단 조형물인 [서하 임춘 문학비]건립 제막식이 있었다.   

 

부안임씨 중앙종친회(밀직공파, 전서공파, 판사공파)에서 의결했다. 한미약품 임성기회장님께서 많은 후원을 하시고 일부 중앙회기금과 임종호 회장님이 출연하여 서하묘소 주변 정화공사와 문학비를 건립한 것이다. 그동안 많은 후손들이 잘못 알고 있었던 서하공에 대하여 역사 바로 잡기와 선양을 위한 첫 걸음을 시작 된 것이다.

 

우리가 선조님 들을 공경하고 모시는 일에는 예의와 정성이 있어야 하고 그분들의 훌륭한 유지를 계승하고 선양 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후대에 이르기까지 가문의 전통과 뿌리를 생각하며 훌륭한 가문의 후손으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서는 객관적인 근거와 정확한 고증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감이 이루어져야 한다.

나의 조상이라 하여 과장되게 부풀리고 편변고루 하여 한쪽으로 치우쳐 왜곡 되어서는 그 조상을 부끄럽게 하고 많은 사람들을 혼란하게 한다.

 

부안임씨 중앙 종친회에서 서하 임춘 문학비 건립(西河 林椿 文學碑 建立) 을 의결한 후 서하공의 어떤 작품을 으로 문학비를 세울 것인가, 또 비문에 어떻한 내용을 기록할 것인지 를 두고 임종철 추진위원장과 임원들은 많은 회의를 통하여 고민하고 연구하였다.

 

서하공의 대표적인 작품 국순전 과 공방전은 그 문장이 길어 전체적으로 문학비에 담기가 어려워, 그분의 생애와 현실을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한 장검행을 선택하게 되었다.

장검행(長劍行)은 작품을 저술 하실 때 의 연대가 정확히 기록이 되어있고 그분을 이해하기 가장 적합 하다고 판단하였다.

 

비문에는 크게 세 가지를 바로 잡기위해 노력 하였다. 우선 서하공의 비석에 증 봉익대부 삼사사 상장군(贈 奉翊大夫 三司使 上將軍)으로 표기되어 많은 후손들이 무인(武人)으로 오해하고 있는 점을 바로잡아 기술하였다.

 

인터넷 자료 등 많은 기록엔 과거에 여러 번 낙방하여 벼슬을 못했다는 냉소적인 부분을 바로잡기 위하여,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표현하였다.  고려 의종조(毅宗朝)에 중진사(中進士)하시어 과거를 준비하시던 중에 정중부의 난(亂)으로 가문이 몰살당하고 홀로 도망쳐 목숨만 유지한 채 피신 하셨다.  가문을 일으키기 위하여 과거에 또 응시하였으나 정중부등의 무신정권들에게 배척되고 경원 당하여 끝내 입신하지 못한 점 등을 객관적 자료를 통해 비문에 기록하였다.

 

또한 서하공 사후 최해 등이 왜곡 표현한 중국의 옛 문헌을 많이 인용했다는 것 역시도, 당시 고려는 중국의 대다수의 문헌과 서적을 통한 교육으로 일상생활에서 의 표기 체계인 한문으로 작품을 써야만 했던 선인들 이라면 누구라도 체험으로 실감하고 견지했을 것이다. (서하공에 대한 시기심이 많았던 최해 역시 중국의 옛 문헌을 많이 인용하였다.) 라는 점 등을 객관적으로 표현 하였다.

 

서하공의 기전체 소설등을 보면 마지막에는 공의 생각을 정리한 “신은 말한다.”라고 결어을 맺었기에 西河公께서는 무신정변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고 전락顚落되어 꿈이 좌절되고 가문이 몰락하였습니다. 그러나 의연하게 그의 이상을 문학으로 승화시켜 우리나라 국문학사에 커다란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公의 공덕은 후학들에게 큰 귀감이 되고 있기에 후손들이 정성으로 西河公의 묘소 앞에 문학비를 세워 公의 선비정신과 문학적 공적을 높이 기리고 후세에 선양하고자 합니다. 라는 후손으로의 존경과 각오를 넣었다.

 

서하공은 우리의 조상만이 아닌 많은 사람들의 스승이고 후학들의 귀감이시다. 이제 서하공을 선양하는 첫 번째 문학비가 건립 되었고 서하묘역을 서하문학공원으로 서하 문학관으로 만드는 출발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