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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 임춘 문학비  (후면 비문)

 

林 諱 椿 할아버님의 자는 기지耆之요, 호는 서하西河 이시다. 한국 임씨의 도 시조이신 신라 충절공 林 諱 팔급(八及 당나라 한림학사로 신라 팽성에 동도)의 14세손이시고, 고려 건국공신인 문하시랑평장사 벽상삼한태사 문헌공 諱 계미(季美 부안관 시조) 의 7세손이시다. 증조부는 대사성찬성사로 윤관장군과 여진족을 토벌하신 충장공 諱 언彦 이시며, 조부 諱 중간仲幹은 동국병람에도 공적이 기록되었으며 평장사로  충경忠敬이라는 시호를 받으셨다. 백부 諱 종비宗庇께서는 한림학사에, 諱 민비民庇는 한림동 평장사에, 부친 諱 광비光庇는 문하시랑 평장사 이시며 3형제가 옥당玉堂에 오르셨다. 고려 의종때 이러한 정치적· 경제적 기반을 지니고 있는 명문가문의 후손으로 태어 나셨다.  

 

학문적 스승이신 백부 諱 종비께 학문을 배우셨고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육. 칠세 때 백가어百家語를 편독遍讀해서 정밀한 이치를 깨달으셨다. 청년기부터 문명을 날리며 문학적 명성으로 기반이 닦여 있었다.  가문의 힘을 빌려 벼슬길에 오를 수 있는 신분이었지만, 학문을 떨쳐 입신하겠다는 기개가 높아 당당한 등용을 준비해 오셨다. 항우를 사로잡은 장량처럼 제왕의 스승이 되는 것을 대장부의 참다운 사업(長劍行중에서)이라 꿈꿔오며 진사과에 진출하였다.

 

그 무렵인 20세를 전후한 시기 1170년(의종 24)에 정중부에 의한 무신정변이 일어났고, 문신 대숙청 이라는 무신정권의 폭정에 최대의 피해를 입어 온 집안이 화를 당했고 조상대대의 공음전 功蔭田과 살던 집 조차 탈취 당한 채 홀로 몸만 겨우 탈출하여 강남땅으로 피신하셨다. 숨어 지내면서 출사出仕의 기회를 엿 보았으나 계속되는 무신정권 속에서 경원 당하자 살아남은 가속을 이끌고 영남 상주의 개령으로 옮겨가 10여년의 유락생활流落生活을 하셨다.

 

 

현재 남아 있는 글 중 대부분이 이 당시에 쓰여진 것인데, 당대의 명 문장가 이인로, 오세재, 조남통, 황보항, 함순, 이담지등과 더불어 죽림고회竹林高會 강좌칠현를 이루시어 술을 벗하고 문학을 논하며 새로운 문풍을 일으키셨다. 주기사상主氣思想을 바탕으로 한 기질이나 개성을 중시하는 문장론을 주장하셨고, 서書·계啓·서序·기記등 안분지기安分知機·가일可逸의 경지를 그려내고 있다.  가전체 소설 국순전麴醇傳과 공방전孔方傳을 저술하시어 우리나라의 고전문학사에 새로운 지표를 세우셨다.

 

그러나 입신으로 옥당에 올라 가문을 다시 세우겠다는 뜻은 끝내 이루지 못하고 얼마 뒤 경기도 장단長湍으로 내려가 고뇌와 곤궁 속에서 향년 32세에 돌아가셨다.

 

公의 친구이자 당대의 문인 미수 이인로는 "배우는 사람들 중에서 그의 문장을 외우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동양 최고의 시인으로 꼽히는 굴원屈原과 송옥宋玉의 반열에 임춘을 세우려 한다".  또한 “군자들이 말하는 귀하게 되고 장수한다는 것은 바로 이를 말함이리라!” 라고 말하고 있다.

 

西河公이 돌아가셨을 때 미수는 묘지서에 "이름은 태산이나 화산과 같이 불멸할 것이요, 재주는 북두칠성과 서로 다툰다". 하였다.

후일 증贈 봉익대부奉翊大夫 삼사사상장군  三司使上將軍에 추증 되셨고 시호諡號는 절의공節義公이시다.

 

西河公께서 돌아가신 20여년 뒤에 이인로李仁老가 公의 원고유편遺篇 약간을 수습하여 6권으로 편집하고, 서문에 "애석하게도 하늘이 많은 날들을 허락하지 않아 저술한 것은 많지만 봉황의 터럭 하나를 보고도 족히 아홉 종류의 날개 빛깔을 알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서하집이 처음으로 간행된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완질로 전하는 것은 없다. 서하집이 중간될 수 있었던 것은, 고려말 담인淡印스님이 혼란한 정세와 전란 속에서 서하집을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하여 청도 운문사 청동항아리(보물제208호)에 복장품처럼 보관한 것을, 500여년이 지나 운문사 스님인 인담印淡이 꿈에 한 도사를 만나 그의 도움으로 다시 찾아 냈는데, 발견한 사람이 인담 이었다는 점이 기이하다 해서 후대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시화집詩話集에서도 자주 언급되고 있다.

 

이렇게 다시 찾은 서하집은 조선 숙종 39년(1714)에 14대손인 임재무林再茂에 의해 중간되었다. 이후 국순전은 문교부 검정를 거쳐서 우리나라 최초의 가전체 소설로 밝혀졌고 현재 영인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과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에 나누어 보관 하고 있으며 중.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학생들이 배우고 있다.

 

서하문학의 일부는 동문선 東文選. 삼한시귀감 三韓詩龜鑑  등의 문헌에 편편이 전해지고 있다. 근래에는 많은 번역가들이 서하집을 출간하여 일반인들의 교양서적으로, 학생들의 참고서로 읽히고 배우고 있으며, 수많은 석학들이 서하문학과 철학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西河公께서는 무신정변으로 인해 모든 잃고 전락顚落되어 꿈이 좌절되고 가문이 몰락하였습니다. 그러나 의연하게 그의 이상을 문학으로 승화시켜 우리나라 국문학사에 커다란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公의 공덕은 후학들에게 큰 귀감이 되고 있기에 후손들이 정성으로 西河公의 묘소 앞에 문학비를 세워 公의 선비정신과 문학적 공적을 높이 기리고 후세에 선양하고자 합니다.]

 

비문 : 2016년 11월 14일 (음력10.15) 23세손 鍾商 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