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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대한 문인 서하공 임춘(西河公 林椿) 할아버님

 

임종철

 

“선생은 문장으로는 고문(古文)의 풍모를 얻었고, 시(詩)로는 대아(大雅)의 풍골(風骨)을 얻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에서 벼슬 하지 않은 사람으로 세상에 뛰어난 사람은 선생 한 사람일 뿐이다. 선생이 죽은 지 20년인데 배우는 사람들 가운데 입으로는 선생의 시를 읊지 않는 사람이 없고 마음으로는 사모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장차 굴원(屈原)과 송옥(宋玉)의 사이에 선생을 자리매기고자 한다. 군자가 귀하면서도 장수한다는 것은 이를 말함이라”(李仁老, 西河先生文集 序文)

 

아무리 절친한 친구라고 해도 찬사가 지나치면 헛된 말이 되고 마는 법인데 당대의 유명인사가 이토록 칭찬을 아끼지 않은 까닭이 무얼까 생각해 봅니다. 누구라도 죽은 사람에게는 예의를 갖추고 또한 서문이란 대개 칭찬이 덧붙여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인로의 칭찬은 칭찬이라기보다는 진심으로 서하(西河) 임춘(林椿) 선생의 글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자리매김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선생의 문장을 고문(古文)에 비견하고, 선생의 시를 중국 역대 시집들 가운데 걸작 중 걸작인 <이소(離騷)>, <대아(大雅)>와 같은 반열에 올려놓고, 선생의 존재를 중국 역대 시인 중에 절개를 지킨 굴원(屈原)과 그 제자로서 아름다운 글로 손꼽히는 송옥(宋玉)의 사이에 자리매기고 싶다고 한 것은 그만큼 선생의 글과 사람됨이 위대함을 정확하게 평가하려 했던 것일 터입니다. 실제로 선생의 문집을 보면 글들이 시든 산문이든 진심과 진실을 표현하고 있는 것을 깊이 느끼게 됩니다.

 

산문으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형식으로 세상을 풍자한 국순전(술 이야기), 공방전(돈 이야기) 등 참으로 모범적인 글들이 우여곡절 끝에 찾아져 전해져오고 있는 것이 천만다행으로 우리민족 문학사에 귀감이 된다고 생각됩니다.

 

이 짧은 글에서나마 선생의 시를 잠깐 소개 드리고 싶습니다. “보잘 것 없는 몸 봄날에 젖어 / 안방 베개머리를 자주도 찾네 / 서늘한 밤 시 쓰는 탁자에 바람이 오락가락 / 노래하는 누각에 해는 저물고 잔뜩 술에 붙잡혀 버렸구나 / 한바탕 봄꿈 떠돌이 생애에 비추어 보며 / 천리 먼 길 이별의 한을 전하네 / 세상 근심 접어두고 다시 한가롭고자 하니 / 요즈음 들어 돌아드는 곳은 옛 숲속 샘물이네” (<꿈을 읊으며(詠夢)>, 필자 졸역.

 

한자 실력이 모자라 기존 번역본들을 참고하여 시의 맛을 살려 번역해 보았습니다) 과거 시험에 연거푸 떨어져서 낙향하여 쓴 시로 추정되는데, 선생의 심정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보입니다. 선생은 고려 정중부의 무신란에 화를 입고포의(布衣베옷, 벼슬이 없는 선비)로 세상의 어지러움을 개탄하는 심정을 시와 산문으로 표출하곤 하셨는데, 단순히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하기보다는 역사적 사실들을 인용하며 비견함으로써 교훈을 얻고자 하셨습니다.

 

시와 산문에 고사들을 많이 인용하였다고 하여 선생의 글을 폄하한 사람도 있지만, 선생의 관직에 나아가 직언할 기회가 없었으므로 역사를 인용하지 않고는 현실의 부당함을 비판하기가 어려웠을 것으로 집작됩니다.

선생은 자신이 포의(布衣) 처지였다고 해서 과거 시험에 낙방한 것까지 불공정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개인적인 현실을 수용하면서도 한사람의 문인으로서 세상사에 대한 심정과 비판을 글로 표현하곤 했던 것이지요. 그이 절친한 친구 이인로(李仁老)가 무신란을 피해 승려가 되었다가 환속하여 과거에 급제하자 축하하는 시와 산문을 쓰기도 했습니다.

 

“늠름하고 빼어난 필력 백전백승의 위엄이니 / 이미 보았듯이 세 차례 시험을 차지하여 현위(賢闈)에 뽑혔구려 / 함께 놀던 시험장에서 그대 먼저 급제하고 / 나는 웃으며 산천 가리키며 홀로 돌아왔네 / 바람 거세게 일으키며 붕새는 북쪽을 따라서 날아가고 / 밝은 달빛에 놀란 까치는 남쪽으로 날아가네 / 산골 아내는 눈처럼 희어진 머리에 놀라네만 / 나는 오로지 올해도 포의(布衣)를 입을 뿐이네” (장원급제한 미수 이인로를 축하하는 시<作詩賀李壯元眉叟>, 필자 졸역)

 

과거시험에 급제하는 것과 시문을 잘 쓰는 것은 사실 별개의 문제일 것입니다. 선생이 과거 시험에 여라 번 낙방하셨다고 해서 그 분의 글이 갖는 가치와 위대함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겠지요. 어쩌면 선생이 관직에 나서셨다면 무인패권 시대에 무슨 보람을 찾으실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 조상 중에 백호(白湖) 임제(林悌) 선생 같은 조선시대 대문호가 계시지만, 서하(西河) 임춘(林椿) 선생은 그보다 앞선 고려시대 대문인이신데도 세간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우리 민족 문학사에 위대한 문인으로 자리매김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 분의 문학사적 위상을 되찾아드리는 것은 우리 자손들의 의무일 것입니다.

 

필자인 저는 스스로 시를 쓴다고 하면서도 종중 일에 참여하기 전에는 우리 할아버지 가운데 이같이 위대한 문인이 계신 줄은 몰랐었습니다. 부끄러움이 앞서고 자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생은 진사 시험에 합격했다가 고려시대 정중부의 무신란(1170년)을 만나 온 집안이 화를 당하고 향년 30세(33세설, 35세설도 있음)로 돌아가셨고, 나중에 봉익대부 삼사사(奉翊大夫 三司使)에 추증되고 ‘절의’(節義) 시호를 받으신 걸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서하(西河) 임춘(林椿) 선생은 관직보다는 “위대한 문인”으로 우리 민족문학을 빛낸 조상으로 모시는 것이 자손된 도리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이번에 마침 부안임씨 중앙종친회 임종호 회장님의 발의로 서하공 할아버님의 묘역 개선사업을 하게 된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앞으로는 더 나아가 서하공을 기리고 선양하는 사업으로 발전되기를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