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꾀고리소리(임춘) - 先組의 얼을 찾아서

 

       잠시도 쉬지 않고 조잘대는 꾀꼬리소리

                    -西河 林椿 조부님의 시 세계-

 

林  鍾  光

부안임씨 밀직공파29손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한글의 모체인 훈민정음이 창제된 것은 15세기 중반인 조선왕조 초기입니다. 따라서 그 이전의 우리의 문자생활은 전적으로 한자, 한문에 의존할 도리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그 시대의 지식인들은 거의 모두가 문자생활을 한문으로 영위하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문화가 한문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서하조부님의 시집도 읽는 내내 한문의 뜻을 이해하는데 많은 품과 노력을 요하게 했습니다. 흔히 시(詩)는 문학의 꽃이라 일컷습니다. 중국에서는 일찍이 공자(孔子)의 시집 시경(時經)이 유학의 주요 경전이 되었듯이 우리나라도 고려때 이전부터 한시가 통용되어왔고 오늘날 우리가 선조들의 시와 작품을 만나는 일은 고양된 삶의 향기와 문학적 자양을 위해서도 긴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고려중기 이인로, 오세재등과 함께  죽림칠현(竹林七賢)의 일원으로 한시사(漢時史)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서하 임춘 조부님(西河公 林椿)의 시를 우리 후대가 읽어 보고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은 분명 중요한 일 일것입니다. 왜냐하면 8백년전의 조상님들의 삶과 흔적 그리고 정신을 오늘에 이어가는 것이 후손의 도리이며 생활의 전부가 될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서하 조부님의 시 곳곳에서, 광포한 시대와의 조우에서 빚어진 처연함을 몸으로 극복하려했던 한 지식인의 초상을 우리 후손으로서 결코 잊어서는 않되기 때문입니다.

 

잘아시다시피 서하조부님(西河)은 고려 무신정권기의 문인으로 부안임씨(부안林氏)의 7대로 자는 기지(耆之), 호는 서하(西河)입니다. 1152년 고려의종 때 태어나시어 30대 후반까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고려 건국공신의 후예로 구 귀족사회에서는 문학적 명성이 있었던 가문이었고 20세 전후에 무신정변을 만나 가문 전체가 화를 입었는데, 겨우 피신해 목숨은 건졌으나 조상 대대로 내려온 공음전을 탈취당하고 약 7년여의 유락(流落)을 겪기도 하셨습니다. 그런 중에도 자천(自薦)을 시도하고 개경으로 올라와 과거준비를 했으나, 무인들의 집권으로 경원 당하며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실의와 빈곤 속에서 방황하다 일찍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이인로(李仁老)를 비롯한 죽림고회(竹林高會)의 벗들과 시와 술을 즐기며 현실에 대한 불만과 탄식, 커다란 포부 등을 문학을 통해 표현했습니다. 강한 산문성을 띤 西河조부님의 시는 자신의 현실적 관심을 짙게 드러내고 있으며, 가전체 소설인 <국순전(麴醇傳)> <공방전(孔方傳)>은 당대의 비리를 비유적으로 비판한 가전체 작품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수 많은 작품 중에서 ‘모춘문앵(暮春聞鶯)’시 한편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모춘문앵(暮春聞鶯) ’

- 늦은 봄 꾀꼬리 소리를 듣고서-

 

田家葚熟麥將稠          농가에 오디익고 보리 익어갈제

(전가심숙맥장조 )   

綠樹初聞黃栗留          초록숲 꾀꼬리 소리 처음 듣누나   

 (녹수초문황율류)

似識洛陽花下客          꽃그늘의 서울손님 알기라도 하는 듯

(사식낙양화하객)                     

慇懃百囀未能休            은근히 재잘재잘 잠시도 쉬지 않네.

(은근백전미능휴)

 

무신란으로 인해 모든꿈이 짓밟혔다. 탄탄해 보이던 앞날은 급전직하 곤두박질 쳤다. 그로부터 삶은 살아있다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았다는 처절함이 그의 생을 짓눌렀다. 시인은 절대궁핍을 몸소 체험하면서 서울 언저리를 맴돌다 마침내는 처가가 있는 경주에 갔으나 의탁할데가 마땅치 않았던지 아사(餓死)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시 속에는 그런 그림자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하기사 굶주림이 그를 억압했더라면 시작 작업인들 엄두나 내었을까? 봄이 다 가도록 꾀꼬리소리 못 듣다가 느닷없는 새소리에 마음이 환해진다. 서울서 듣던 그 꾀꼬리 소리다. 내 주위를 떠나지 않고 계속 수다를 떤다.

“서울서 뵌 분 같아요. 저 모르시겠어요? 저예요, 저라니까요. 여기좀 봐용”

잠시도 쉬지 않고 조잘대는 꾀꼬리소리에 마치 내가 예전 서울 꽃 그늘아래 벗들과 어울려 술잔을 앞에 놓고 노닐던 그 나무그늘에 다시 앉은 것 같다.

이렇게 또 한 해 봄이 흘러간다. (참고문헌:서하시집,민속원)

 

서하 문집을 한땀한땀 읽으면서 많은 것을 느끼게 했습니다. 난세에 그래도 삶을 부지하며 위로받을 수 있는 것은 좋은 친구가 있기 때문임을 읊고 있고, 친구와의 관계를 통해 불우한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확인하면서 자아의 성취의지를 고취시킨듯 했습니다. 특히, 모춘문앵 시에서 알듯이 초록빛 나무와 노란 꾀꼬리의 색조가 유독 대조됨은 꾀꼬리도 자신을 알아보는데 사람들로부터는 인정받지 못한다는 느낌이 절반의 언어로 표현되고 형상화되고 있어, 말 밖의 현실세계에 대한  무궁한 뜻을 함축하고 있는듯 합니다.

 

시작품을 통해서 가문에 대한 높은 긍지를 드러내면서 그 영예를 계승하고자 하는 소망을 짙게 그려내고 있는 듯합니다. 벼슬길에 진출하고자 했으나 포부가 좌절됨은 못내 아쉬움과 안타까움으로 오랜 시간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습니다. 때문에 기개와 자부가 대단하고 문학적인 역량도 뛰어났으나 시대를 잘못 만나 진출의 길이 막히고 꺾인 서하는 그래도 비극적 인식의 극명한 작품을 후세에 남김으로써 오늘날 까지도 그의 정신과 가치는 생생하게 살아남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 후손들이 기억하고 더 먼 미래에까지 그 정신을 이어가고 존경하며 기리는 일에 한치의 소홀함도 있어서는 않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