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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 문학관 서문(序文)

 

서하 문집 6권의 구성은 총 268편의 작품으로

제 1, 2, 3권은 고율시古律時 214편

제 4권 서간문書簡文 18편

제 5권 서, 기, 전 序, 記, 傳 14편

제 6권 계, 장, 제문 啓, 壯, 祭文 22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외에 동문선東文選,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 복양 오세재 선생의 생애와 문학세계, 미수의 파한집破閑集, 이규보의 백운거사문집白雲居士文集 등에 편편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서하공이 돌아가신 후 죽림고희의 친구인 미수 이인로님께서 [역사적으로 벼슬을 하지 못한 사람으로 세상에 뛰어난 사람은 한 사람 뿐이다. 그가 죽은 지 20년, 배우는 사람들이 입으로 그의 시를 읊으면서 마음으로 흠모하지 않는 자가 없다. 장차 굴원과 송옥의 반열에 두려 하니 군자가 이른바 귀하고 장수한다는 것이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이제 뒷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유편 遺篇 약간을 모아 집의 아들 비秘를 시켜서 교정하여 쓰게 하고 인쇄하여 전하려 한다. "애석하게도 하늘이 많은 날을 허락하지 않아 수집한 것이 많지는 않으나, 봉황鳳凰의 터럭 하나를 보고도 족히 그 아홉 종류의 날개 빛깔을 알 것이다."]

이렇게 미수 이인로님께서는 서하 조부님이 돌아가신 후 20여 년간 서하공의 유필遺筆을 찾아 수집하고 엮어서 서하 문집 6권을 발간한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 후손들은 서하 조부님이 얼마나 위대한 문인이신지, 위대한 선비 이신지를 학생들과 문학인, 일반인들 보다 많이 알지 못했고, 또한 올바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제대로 후손들에게 알려주지 못 했습니다.  많은 후손들은 족보와 유택 입구의 신도비, 비석을 보며, 서하공이 무인으로 “삼사사 상장군 순군부령 시호 절의공”으로 잘못 알고 지내왔습니다. 또한 일부 역사가들은 과거에 몇 차례 낙방한 것과 문학에 대한 비판과 왜곡이 있었습니다.

 

서하공이 훗날 추증 받으신 “증 봉익대부 삼사사 상장군 순군부령 시호 절의공”은 서하 조부님의 시 [장검행]에 나오듯 한나라 태조인 유방을 도와 초나라 항우를 물리치고 중국을 통일한 장량(자방)과 같이, 조부님의 인생 목표였던 임금의 스승이 되어 나라에 보국하겠다는 내용을, 후일 도학자들이 무인 장군들을 통솔하는 상장군 같다 하여 그렇게 추증하여 올린 것으로 실제는 무인이 아닙니다.

 

서하 조부님이 과거에 번번이 떨어졌다고 냉소적인 일부 비평가들의 평가는, 고려 건국 공신이신 벽상삼한태사 평원군이신 중시조 휘 계미 이후 조상 대대로 고위 관직에 계셨고 부친의 삼형제 모두 조정의 고위 관료로 정치적, 경제적으로 안정된 귀족의 자손 이였습니다. 과거를 보지 않고도 벼슬에 나갈 수 있는 상황 이였으나 당당한 꿈의 실현을 위해 과거의 첫 관문인 진사에 합격하고 본 시험을 준비 중일 때 정중부의 난이 일어난 것입니다. 정중부의 난을 일으킨 무인들은 집권세력과 문인들을 무참히 죽였고, 우리 집안은 무인들에게 집중적인 탄압을 받아 온 집안이 몰살당했고 살던 집과 공음전마저 빼앗긴 채 서하공만 겨우 탈출하였던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잃고 혼자 남은 서하 조부님께서 다시 집안을 일으키고 살아갈 방법은 오직 과거를 통한 입신 뿐 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권력을 잡은 무인들은 의종을 폐위시키고 신종을 새로운 임금으로 세우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무단 정치를 계속하였습니다. 몇 차례 과거에 응시 하였으나 무인들에게 탄압 받는 집안으로 인식되어 있기에 합격할 방법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시험에 미련을 버릴 수 없었던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내용이 여러 편의 문장에 자조 섞인 글로 보입니다.

 

서하공을 시기해 문학적 비판을 한 최자는 최충헌과 최항등 집권세력의 주문으로 강좌칠현의 문학을 비판했고 보현집을 저술하였으나, 미수의 파한집을 본 따서 만든 것으로 현재까지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고려 최고의 문장가라 불리는 이규보는 서하 조부님이 국순전 발표하신지 15년 후에 비슷한 내용인 국 선생전을 발간하여 서하 조부님의 문장을 모방하였습니다.

 

서하문집은 고려 말 극심한 혼란기에 없어지고 잊혀 졌으나 그때 담인 스님이 청동 호에 넣어서 보관한 것을 350여년이 지나 운문사 인담 스님의 현몽으로 다시 찾아 세상에 나왔습니다.

또한 돌아가신 후에는 500여 년간 무덤이 실전되어 잊혔으나 하운공과 해사공으로 인해 유택을 다시 찾아 제사를 올리게 되어, 비로소 후손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현재 서하문집은 학생들의 참고서와 일반인의 교양서적으로 여러 편이 번역되어 발간되었고, 많은 석학들이 서하문학과 철학사상에 대한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였습니다. 고전 문학사에 빛나는 <국순전> 과 <공방전>은 우리나라 최초의 가전체 소설로 중.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학생들이 배우고, 대학입시와 공무원시험 문제에도 자주 나오는 문장입니다. “한국을 빛낸 100인의 위인” 이라는 가요에는 "죽림칠현" 이라고 표현한 부분이 있습니다. 죽림칠현의 인물은 임춘, 이인로, 오세재, 조통, 황보항, 함순, 이담지 7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필자는 2001년 4월 인천 원인제 에서 열린 “쌍명재(미수) 이인로선생 문학비” 건립(국문학과 대학교수 200명의 모임인 “문인 선비 비석 세워 드리기 단체”)에 참여 하였고, 2001년 10월 경주에서 “복양 오세재선생 문학비” 건립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이인로의 후손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대학원) 이형석교수에게 답례로 받은 <파한집>, <쌍명재집> 그리고 오세재 후손에게 받은 <복양 오세재 선생의 생애와 문학세계> 에서 서하문집에 없는 새로 발견한 서하공의 유필 5점을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서하공의 시 중에 천 권의 책을 읽고, 삼천여 편의 시를 지었다는 내용으로 보아 미 발견된 시와 문장이 많이 있으리라 사료되며, 우리 후손들이 관심을 갖고 찾아야 할 사명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홈페이지 서하문학관 개관은 전자 족보와 홈페이지 개통을 위한 제한 된 시간으로 많은 작품을 소개하지 못 하였으나 앞으로 계속 보완하여 추가로 소개하고 해석할 예정입니다.

 

우리나라 임씨의 도시조 이신 충절공 휘 팔급의 방계 후손인 나주 임씨에는 백호 임제라는 문인이 있습니다. 조선 선조 때 평양 감사에 부임하러 가던 중 황진이 무덤에서 잔을 올리고 재배하며 읊은 시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로 시작되는 시로 인해 부임도 못하고 파면된 일화가 있습니다.

나주 임씨에서는 그분의 문학비, 기념관, 문학관등을 개관하고 백호 임제 선생 시화전, 백호 문학상등을 운영하며 선양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서하공께서는 무신정변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고 전락 되어 꿈이 좌절되고 가문이 몰락하였습니다. 그러나 의연하게 그의 이상을 문학으로 승화시켜 우리나라 국 문학사에 커다란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서하 조부님께서 모진 역경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은 선비 정신과 위대한 문학적 공적은 후손과 후학들에게 큰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학적 업적과  불굴의 선비 정신을 많은 분들의 소망으로 모아  서하문학비,  서하문학공원, 서하문학관 건립 등으로 발전시키며 선양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 종인들께서 뜻을 모아 꼭 이룰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2019년 11월 20일   24世 종상